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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스턴 마틴, 아이콘이 되기까지
2023-02-21T19:11:28+09:00

품위와 탁월함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대표작들을 끊임없이 쏟아내는 브랜드, 애스턴 마틴.

자동차 마니아는 물론이고, 그렇지 않은 일반 사람들에게도 애스턴 마틴은 누구나 곧바로 알아볼 수 있는 이름이다. 수십 년에 걸쳐 쌓아온 수많은 찬사와 수상실적으로, 애스턴 마틴은 스포츠카의 세계에서 날렵한 스타일과 인상 깊은 성공 스토리의 상징이 됐다. 세련미와 럭셔리함, 그리고 기능성을 자랑하는 특별한 자동차는 바로 이 브랜드를 설명하는 핵심 키워드들이다.

애스턴 마틴의 시작

1913년 리오넬 마틴과 로버트 뱀포드에 의해 애스턴 마틴이 설립되면서 성공의 공식이 시작됐다. 그들의 초기 목표는 그저 매력적이기만 한 스포츠카가 아닌, 품위와 탁월함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최고의 머신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이들의 첫 번째 자동차는 잉글랜드 버킹엄셔에서 태어났다. 애스턴 클린턴 마을에서 열리는 힐 클라임 레이스에 참가했던 마틴이 좋은 기록을 위해 특별히 디자인된 자동차를 만든 것이 그 기원이었다. 다행히 이 차량은 성공적이었고, 마틴과 마을의 이름을 하나씩 따서 애스턴 마틴이라는 브랜드가 만들어졌다. 오늘날, 애스턴 클린턴의 한 명판에도 이 영광스러운 역사가 기록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Bamford and Martin (1914 – 1925)

이후, 내구 레이스의 세계에서의 셀 수 없이 많은 성공이 뒤따랐다. 이들의 역사는 클리브 갤럽과 루이 즈보로스키가 탔던 애스턴 마틴의 자동차들이 세상에 첫선을 보였던 1922년 프렌치 그랑 프리에서 시작된다. 뒤이어 다음 해에는 잉글랜드 서리에서 열린 브룩랜드 모터 레이싱에서 10개의 기록을 갈아치우는 역사를 썼다.

1920년대 후반에는 원래 ‘스포츠 모델’이라 불리던 인터내셔널이 만들어졌다. 32년 동안 생산되었던 이 차량은 해당 시기에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1930년대 초반에 들어서자 브랜드는 한계에 부딪혔다. 애스턴 마틴은 경쟁사들이 제시했던 여러 발전을 뒤따라갈 수 없었고, 이는 자연히 생존 경쟁에서 도태되게 만들었다. 실제로 당시 애스턴 마틴은 로드 브레이크와 실린더 헤드 등의 문제로 인해, 경쟁 브랜드의 모델들보다 뒤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The New International
Image Credit: Drive-my.com

그렇게 진통을 거치며 뉴 인터내셔널이 탄생했다. 디자인은 비슷했지만, 원래의 웜 기어 대신 ENV 리어 액슬을 탑재하여 발전된 섀시를 선보였다. 이는 어느 측면에서 보더라도 이미 고성능을 자랑했던 자동차의 2세대 버전으로 여겨졌다. 애스턴 마틴은 이에 그치지 않고, 새 인터내셔널과 함께 미래 레이싱카의 진정한 원형이 될 수 있도록 디자인된 여러 종류의 스포츠카도 만들기 시작했다.

이들의 목표는 즉각적인 응답성과 함께 향상된 핸들링과 손쉬운 작동의 자동차를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새로운 실린더 헤드와 흡기 매니폴드를 적용해 자동차가 더 강력한 파워를 낼 수 있게 했고, 로우 프로필 전자 주조 방식은 기존의 알루미늄 소재보다 더 가벼운 무게로 부품의 경량화를 끌어냈다. 그 결과, 새로운 차들은 더 빠르고, 더 기민하며, 리스폰스도 빨라졌다. 이렇게 경쟁을 위한 만반의 준비가 끝나가고 있었다.

새로운 피를 수혈받다

애스턴 마틴 역사상 모두의 사랑을 받았던, 동시에 가장 상징적인 자동차 ‘르망’을 선보인 것은 1932년 10월이었다. 2인승과 2/4인승이 모두 가능한 차체를 가진 르망은 강력한 70BHP 엔진과 함께 라디에이터 라인을 줄인 설계가 이뤄졌다. 애스턴 마틴의 인터내셔널 라인과는 달리, 르망은 양산차 판매 비중도 컸기에 이전의 애스턴 마틴보다 쉽게 살 수 있었다. 1933년 후반에는 4인승 버전인 르망 스페셜 4인승 모델도 소개됐다.

당시 몇 년 동안 상당한 재정 하락에 시달리던 브랜드였기에, 새로운 개발은 현명한 결과로 다가왔다. 1930년대 중반, 몇 년 전 소유권을 가지고 있었던 고든 서덜랜드는 15/98을 비롯해 더 두드러지는 유명한 양산 차량을 선보였다. 2인승과 4인승 옵션으로 제작되었고, 98BHP 엔진으로 설계된 이 차량은 브랜드의 표준이 되었다. 동시에 향후 10년 동안 애스턴 마틴의 가장 잘 팔리는 모델로 자리했다.

The Aston Martin Atom
Image Credit: Hemmings

이쯤 되자 애스턴 마틴은 재정난을 해결하고, 동시에 브랜드의 간판으로 내세울 새로운 콘셉트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애스턴 마틴의 수석 엔지니어인 클로드 힐이 아톰을 설계한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사각형 단면 튜브로 제작된 이 자동차는 독특한 구성을 자랑했고, 특유의 날렵한 스타일과 파워풀한 파워트레인으로 격찬을 받았다. 실제로 아톰은 전후의 이 성공 덕분에 상당한 명성을 누렸다.

많은 해외 소비자들이 이 자동차에 관심을 표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하지만 이 엄청난 수요를 충족시킬 만큼의 생산이 이뤄지려면 엄청난 투자가 필요했다. 그렇게 선덜랜드는 신문 광고를 통해 회사를 매각하기로 결정한다. 요크셔의 사업가 데이비드 드라운이 이에 관심을 보이자, 선덜랜드는 그의 아톰을 몰고 브라운으로 찾아갔다. 그는 이에 감명을 받아 1947년에 애스턴 마틴의 소유권을 인수했다.

브라운은 자신의 명예에 안주하지 않고, 전임자들이 남겨두고 간 애스턴 마틴의 잠재력을 보았다. 그는 선구적인 스포츠카의 아름다움과 날렵한 스타일을 높이 평가했고, 브랜드와 자신이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했다. 또한 애스턴 마틴이 그들의 성능 지향적인 디자인 포트폴리오가 더욱더 세계적인 인정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브라운은 결정적으로, 애스턴 마틴이 전 세계의 레이스에서 많은 경쟁자를 만들리라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다.

Aston Martin DB3S
Image Credit: Aston Martin

이러한 자신감은 바로 DB1와 DB2의 탄생에 박차를 가했다. 분명 깊은 인상을 남긴 차량이었으나, 실제로 속도 경쟁의 세계에서 큰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했다. 이 부족한 퍼즐을 채우기 위해 애스턴 마틴에게는 제대로 설계된 스포츠 전용 모델이 필요했고, 그렇게 1953년 DB3S가 탄생했다. 레이싱의 황금기에 만들어진 이 자동차는 오랜 시간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하지만 단지 시대를 잘 타고나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DB3S는 아름다움의 완벽한 예시였다. 전설적인 자동차 디자이너 프랭크 필리는 매끄럽게 물결치는 유려한 곡선을 만들어냈고, 선도적인 엔지니어들은 자동차 차체의 발전에 기여했다. 이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내구 레이스인 르망 24시 레이스에서 경기하기 위해 특별히 설계된 DB3S/2로 이어졌다.

Aston Martin DB3S/2
Image Credit: RMS Sotheby’s

DB3S/2는 곧바로 성공을 끌어냈다. 굿우드 9아워에서 우승을 거두고, 던드로드의 RAC 투어리스트 트로피에서 2위에 오르는 등 수년에 걸쳐 무수한 레이스에서 승리를 거머쥐었다. 그러나 중대한 트랙 손상에 의한 문제도 있었기에, 이 차량은 새로운 차체 구조와 개발 의뢰를 받았다.   

시대를 대표하는 문화 아이콘 

물론 현대에 와서는 대중문화 아이콘과의 연계 또한 엄청난 중요성을 갖는다. 애스턴 마틴은 1964년 제임스 본드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인 영화 ‘골드핑거’의 개봉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누렸다. 숀 코너리의 제임스 본드는 엄청난 추격전 시퀀스를 통해 훌륭하게 DB5를 운전하는 모습을 선보였다. 이 DB5는 현재 런던 영화 박물관의 코벤트 가든에 전시되어 있다.

이 차량은 1965년 영화 ‘썬더볼’에서 다시 등장했다. 여기서는 트렁크에 든 물대포, 제트팩과 같은 본드 스타일의 장비와 함께 달라진 모습을 보였다. 몇 년 후, 조지 라젠비가 본드를 연기한 유일한 영화, ‘007과 여왕’에서 다시 한번 나타났다. 그리고 1980년대에는 티모시 달튼과 피어스 브로스넌이 이 멋진 자동차를 몰았다.

The DB5 driven by Sean Connery in Goldfinger
Image credit: Timeout

둘 사이의 차이라면, 브로스넌은 애스턴 마틴의 다른 두 종류의 모델을 몬 첫 번째 제임스 본드라는 점이다. 그리고 그 두 번째 모델은 2002년, ‘007: 어나더 데이’의 V12 뱅퀴시였다. 이를 이어 2006년에는 ‘007: 카지노 로얄’에서 다니엘 크레이그가 DBS를 몰았다. 이 자동차는 여태까지의 기록을 깨부수며 일곱 번이나 뒤집히고 구르는 아이코닉한 충돌 신으로도 유명하다. 

본드와의 명백한 연결고리를 넘어서, 애스턴 마틴의 자동차는 또 다른 아이코닉한 영화에도 등장했다. 바로 알프레드 히치콕의 1963년도 고전, 영화 ‘새’의 티피 헤든이 DB2/4의 바퀴에 앉아있는 장면이었다. 그리고 ‘이탈리안 잡’의 1969년도 오리지널 버전에서도 마이클 케인의 캐릭터가 DB4를 몰았다.

Tippi Hedrn behind the wheel of the DB2/4
Image Credit: IMCDB

당연하게도 라파엘 나달, 데이비드 베컴, 휴 그랜트를 비롯한 수많은 유명인이 애스턴 마틴을 구매했다. 다니엘 크레이그는 자동차의 아름다움에 너무나 빠진 나머지 V12 밴티지 로드스터를 구매할 정도였다.

새 시대를 맞이한 애스턴 마틴

2000년대는 애스턴 마틴의 세계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이 신생 브랜드가 도움을 구했던 격동의 10년이 지나고, 1990년대 초에 포드가 소유권을 인수했다. 생산은 증가했고, 품질은 강력한 엔진처럼 더 현대적인 특징에 중점을 두었다. 애스턴 마틴은 이 시기에 레이싱 무대로 복귀를 선언했다.

애스턴 마틴 레이싱의 첫 시작은 아메리칸 르망 시리즈 세브링에서였다. DBR9D는 이를 위해 특별히 고안된 차량이었다. 이 자동차는 LMGT1 부문의 세브링 12아워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2006년도 GT1 매뉴팩쳐러 챔피언십에서 2위로 마무리했다. 이에 이어 2007년에는 르망에서 GT1급의 승리를 거두었다. 애스턴 마틴은 2008년, 안토니오 가르시아, 데이비드 브래햄, 대런 터너가 이끄는 팀으로 다시 한번 우승을 거뒀다.

Image Credit: Serious Wheels

이러한 초기의 승리들은 애스턴 마틴을 그 뿌리로 완전히 돌아갈 수 있도록 만들었다. 실제로 2010년, 애스턴 마틴은 그 민첩성과 빠른 작동으로 잘 알려진 DBR1-2라는 프로토타입을 선보였다. 이는 월드 스포츠카 챔피언십과 르망 24시 레이스뿐 아니라, 1959년 무려 6승을 거두었던 DBR1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

2014년, 애스턴 마틴은 다시 르망 24시 레이스에서 관중들을 열광시켰다. 이번에는 크리스티안 폴센, 니키 티임, 데이비드 하이네미에르 한손의 덴마크 삼총사가 #95 V8 밴티지 GTE를 몰았다. 애스턴 마틴은 강력한 경쟁자들의 도전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레이싱 무대를 지배하며,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 속도로 여전히 달려나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