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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일 없어도, 읽다 보면 블라디보스토크 여행기
2023-02-22T19:28:23+09:00
Vladivostok

책 세 권 들고 떠났다가 저자 소개만 읽고 왔다.

불운한 날이었다. 아니 더없이 평범한 하루였다. 성실하게 낮과 밤을 살아냈을 뿐인데, 느닷없이 고개를 내민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친구는 그렇게 백수가 됐다. 걸리적거리는 돌 주제에 상처를 투척하네. 쓰린 부위가 하필 마음과 정신이라 문제다. 기역 자가 많아서인가 권고사직이란 글자가 얄밉도록 점잖게 느껴져, 비겁하게. 잘렸다는 말은 음흉해 보이지나 않지. 회사 사정도 알겠지만, 그렇다면 내 사정은요. 말하지 못하고 일개미처럼 일하다 짐을 꾸렸다. 친구의 시린 뒷모습에 내 그림자 한 번 포개주고, 짝다리 짚고 시비 거는 지긋지긋한 일상 밖으로 함께 도망치기로 한다. 서푼짜리 위로의 말을 건네는 것보다는 나을 거 같아서.

목적지 후보로 지명된 곳은 통영, 경주, 부산을 시작으로 하루에 다섯 끼씩 먹고 싶은 방콕, 홍콩, 베트남을 거쳤다. 지도 위 이곳저곳을 방황하다 결국 시베리아 횡단 열차가 노곤함을 싣고 긴 여행을 시작하는, 블라디보스토크에 다다랐다. 고요한 공기의 결을 즐기며, 무성영화처럼 말없이 변하는 창밖 풍경을 응시하다, 이름 모를 역에 내려 간단히 요기하고, 찰나의 인연들과 눈인사로 서로의 안녕을 빌어주는 일 따위를 동경하던 나에게 이 도시는 반가운 기별이었다. 그렇게 블라디보스토크행 항공권을 끊었다.

비행기 표도 준비됐고, 숙소는 숙박 앱 특가로 뜬 제일 상단 호텔로 정했다. 새벽 도착이니 택시도 미리 불러 놓자는 친구의 제안도 기꺼이 수락. 부가적인 준비라면 난 난생처음 앞머리를 잘라 동안 얼굴을 시도했고, 곧바로 실패했고, 친구는 도톰한 니트 한 벌을 사며 퇴직금 탕진에 불을 지폈다. 무탈한 시작이었다. 탈이 난 건 바로 내 허술한 준비성이다.

발권 창구의 직원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여권을 돌려주었다. “만료된 여권인데요.” 애매하게 다른 여권 속 내 얼굴을 제대로 확인 했었어야 했는데. 금요일 저녁, 꽉 막힌 도로를 질주한다 한들 도저히 각이 나오지 않았다. 문득 그가 생각났다. 그가 모는 차 뒷자리에 앉아 폭주를 멈추라며 항상 짜증을 냈었지만, 지금 필요한 건 바로 당신의 스피드와 과감한 핸들링. 금요일 밤을 더할 나위 없이 만끽하고 있던 이에게 전화를 걸어 여권의 위치를 알린 후 무리는 하지 말되, 과태료는 내가 내주고 벌점은 선물로 대신하리라 간청했다. 그는 수면 바지를 입은 히어로처럼 등장해 차창 밖으로 여권을 던지며 툴툴거렸지만, 뿌듯함이 얼굴 위에 번졌다. 그는 해냈다.

여권 전달자의 패기, 창구 직원들의 배려, 30분의 비행기 연착, 친구의 인내가 모였고, 우린 무사히 여행지에 도착했다. 누군가의 외로운 망명길에도 마중을 나왔을 자욱한 안개를 스치며 시차는 1시간, 블라디보스토크의 축축한 새벽과 만났다.

새벽 다섯 시가 넘어 잠이 들었지만, 허기엔 장사 없다. 일찍 일어나 무전여행 64일 차처럼 보이는 몰골로 내려가 호텔 조식을 챙겨 먹었다. 떠나기 전 이것저것 생각하기조차 싫은 상태였던 우린, 어떤 정보도 알아 오지 않았고, 이런 서로를 탓하지도 않았다. 부른 배를 두드리며 호텔을 나와 무조건 직진을 외쳤다. 혁명광장에 들어선 장터가 보였다. 유심의 힘을 빌려 재빠른 검색. 토요일에만 열리는 마켓이란다.

필요가 있을지 없을지 모를 2019년 달력 포스터를 잔망스러운 돼지 얼굴에 현혹돼 4장이나 구매했다. 꿀이 유명하다고 하니 주인이 내미는 수저를 받아 머리가 띵해질 만큼 달달함으로 입속 가득히 채웠고, 단짠을 위해 소시지를 사 먹었다. 너와 나, 살아 있는 생의 색감들을 두 눈에 담아내며 즐비하게 늘어선 천막 사이를 오랜 시간 오갔다.

 허공에 예민한 몸짓으로 구애를 하는 앙상한 가지를 바라보며, 모든 것을 털어내고도 온전히 자리한 나무들에 위안을 받기도 했다.

떠나오기 하루 전, 우연히 넘긴 과월호 잡지 속에서 우연히 이 도시에서 맛볼 수 있는 커피숍에 대한 글을 목도했다. 운명이었다. 조물주는 게으른 이에게 우연을 운명이라 믿게 만드는 망상을 주셨고, 그렇게 필연처럼 찾아온 ‘카페마’는 지친 우리에게 카푸치노 한 잔을 내어 주었다. 불친절과 무뚝뚝함은 의미상 전혀 다른 선상에 놓여 있다. 러시아를 검색하면 나오는 이야기 중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러시안들의 무표정함에 대한 후기인데, 나는 처음 마주한 이방인에게 얼마나 다정한 환대를 했을까. 카페마는 소란하지 않은 모습으로, 무뚝뚝하지만 편안하게 그곳에 있었다.

그래도 이왕 왔는데 SNS 명소는 가야 하지 않겠니. ‘짠내투어’에도 등장한 독수리 전망대로 향했다. 도시가 크지 않아 걷기에 무리가 없었다. 언덕을 한참 올랐다. 우리 케이블카 타자. 한마음 한뜻, 일사천리였다. 얼마의 돈을 지급하고 장난감처럼 작은 케이블카에 발을 디뎠다. 전망대는 높이 있어 올라가야 하는데, 시원하게 하강한다. 우리가 탑승한 지점이 도착 지점이었던 것. 다시 원점이다.

최대한 여유 있는 웃음을 지으며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다시 돈을 내고 연어처럼 거슬러 올랐다. 조금만 더 걸으면 보이는 전망대를 두고. 그래도 괜찮다. 내 인생은 항상 이런 식이었으니까. 난 나에게 적응을 마친 상태니까. 다행스럽게 노을이 그날의 기억으로 하늘을 물들이기 전 우린 도착했고, 금각교를 중심으로 펼쳐진 블라디보스토크의 소박한 시내를 조망했다. 지인들에게 사진을 보내니, 부산이냐며 부럽다고, 회는 꼭 먹고 오라고 말했다.

푸석푸석, 바삭바삭한 블라디보스토크 풍경 위에 보습크림을 덧발라 주고 싶었다. 이 건조하고 작은 도시를 우리는 마치 시를 읽는 이의 리듬으로 천천히 걸었다. 허공에 예민한 몸짓으로 구애를 하는 앙상한 가지를 바라보며, 모든 것을 털어내고도 온전히 자리한 나무들에 위안을 받기도 했다. 쓰고, 떫고, 줘도 안 먹을 세상을 견뎌내기 위해 그곳에서 우린 캄캄한 어둠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눴는지도 모르겠다.